사물은 사상의 증거가 된다
"당신이 세계를 여행할 때, 당신은 사물을 봅니다. 그건 민트 그린이나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채색된 그리스의 멋진 집의 한 부분일 수도 있고, 모로코에서 흔히 지나가는 누군가의 옷일 수도 있습니다." - 폴 스미스
어디에서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던 폴 스미스. 그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광경과 그 풍경을 이루는 여러 사물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 곳곳을 헛되이 지나치지 않았으며 자신의 시선으로 붙잡았다.
그가 가장 영국스러운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얻게 된 이유도 주변을 관찰하고자 했던 태도, 바로 그 때문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의 스타일을 두고 "현재의 렌즈를 통해 본 과거의 스냅샷"이라고 했다. 직접 찍은 꽃 사진을 쇼파 무늬로 활용하는 천진함이 곧 그의 디자인 세계다.
©Paul Smith
면밀한 관점은 초보 사진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십대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유년시절 배경이 사물을 관찰하는 그의 면모를 키웠다. 싸이클 선수를 준비하다 교통사고로 꿈을 접었으나, 그가 언젠가 미디어에 밝힌 것처럼 모든 날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실현되지 않은 열망을 숙고하는 대신 예기치 않은 충돌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꿈꿨다. 으레 또래처럼 학교에 갈 나이었음에도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의류 창고에서 창고지기로 의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새로운 나날을 만들어갔다.
사고당했을 때 펍에 자주 갔는데 때마침 그곳엔 예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고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리며 다른 분야로 시야가 트이게 된다. 점원으로 일했던 의류 가게가 이때 만났던 친구네 가게다.
폴 스미스와 그의 부인 폴린 데니어 ©gettyimages
이후 런던의 왕립예술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한 부인 폴린 데니어를 만나 디자인을 시작한다. 부인이 일대일 튜터가 된 셈이다. 폴 스미스 스스로 아내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옷의 비율, 원단의 선택까지 모든 걸 배웠다.
정교한 커리큘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피드백도 빨랐으니, 늦은 배움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디자이너로 각성한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 지미 페이지를 위해 바지를 만들었고 데이비드 보위에게 옷을 입혔다.
©Paul Smith
실행과 학습의 반복. 때로는 타인의 어깨너머로 또 자신의 시선으로 의복의 형상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정립해 나간다. 이후 나고 자란 노팅엄 한구석에 3㎡의 창문도 없는 곳에 가게를 열고 프리랜서로 활동한 지 불과 6년 만에 파리의 한 컬렉션에서 데뷔한다.
브랜드로서 폴 스미스는 여전히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로 남아있다. 대기업에 인수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개하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 브랜드다. 폴 스미스는 이 사실을 매일 아침 “보스가 없다”는 말로 일깨운다. 폴 스미스는 이름처럼 폴 스미스의 최고경영자이자 주요 주주이며 최종 디자인 책임자이다.
조너선 아이브와 폴 스미스 ©Darren Gerrish/WireImage
애플의 최고디자인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는 “폴 스미스는 전통 디자인 도그마에 의해 확립된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고 평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며 대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길을 선택한 그의 판단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가는 길보단 자신의 선택을 믿었던 삶의 태도에서 오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들로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 자신은 절대 패션잡지를 보지 않는다고 밝히며 덧붙인 그의 생각이다. 그가 지닌 의외성의 면모는 곧 절제되지 않은 자기표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디자인이 유쾌한 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무얼 보느냐 따위는 중요치 않고 자신이 뭘 보느냐가 관건이라는 그의 이야기처럼. 때로는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Paul Smith
그는 도전을 즐긴다. 의류뿐 아니라 가구나 생활용품에도 천착한다. 보이는 모든 풍경이 그에겐 영감이 되니,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의 표현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표현의 밀도는 다른 영역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고전에 변형을 가해 위트를 더하는 디자인 방식 말이다. 책, 의자, 조명, 물병, 러그, 자전거, 카메라, 자동차, 모터사이클, 스노우보드 등 무엇 하나 뛰어들지 않는 데가 없다. 폴 스미스 공식메일 중에 인테리어 계정이 따로 있을 정도니. 그가 가진 관심의 크기가 짐작된다.
2019년 진행된 전시<헬로, 마이 네임 이즈 폴 스미스>의 한 장면. 폴 스미스의 사무실을 재현했다 ©DDP
생각해보면 폴 스미스가 인테리어 파트를 전개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방랑하며 주워온 많은 물건이 자신을 흥미롭고 즐겁게 만든다고 했으니.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축적’은 하나의 아이디어 차원으로 새로운 컬렉션과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창고가 된다고.
그래서 그의 사무실은 온갖 물건들로 혼잡하기 짝이 없다. 하물며 책상은 일종의 전시대다. 따라서 그가 어떤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지 의복이 아닌 무언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물건을 디자인했는지, 또 수집한 물건은 무엇인지. 사물은 한 개인을 대변하는 사상의 증거이니 말이다.
"나는 패션과 다양한 종류의 보석, 책, 미술품, 골동품 그리고 흥미롭고 아름다운 장난감들을 섞는다." - 폴 스미스
©Paul Smith
Paul Smith For Leica - Leica CL Paul Smith Edition
독일의 카메라 제조업체 라이카와의 두 번째 협업. 항상 카메라를 지참하고 다니는 폴 스미스에게 라이카와의 협업은 의미가 남다르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관찰자의 면모를 심어준 도구가 바로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폴 스미스는 사고의 근원을 쌓았다.
카메라 뒷면에 폴 스미스의 필체로 ‘Look and see’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보지만 종종 그들은 보지 못한다”는 폴 스미스의 잠언을 인용한 것으로 그의 세계관을 짐작케 하는 디테일이다.
©Leica
라이카 협업의 씨앗이 된 폴스미스의 랜드로버 디펜더 커스텀 모델 ©Paul Smith
900대 한정으로 생산된 이 제품은 7가지의 색상 에디션이 있다. 폴 스미스는 지난 2016년에 폴 스미스와 랜드로버가 협업한 랜드로버 디펜더 커스텀 모델에 착안해 색상을 전개했다. 각각의 제품엔 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본체에 폴 스미스의 삽화가 새겨져 있어 재미 요소가 많은 카메라다.
고전적인 바디에 일러스트와 같은 키치한 요소들을 도입하고, 형형한 네온 컬러의 스트랩을 전개함으로써 폴 스미스의 디자인 접근 방식을 반영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협업 모델이다.
©Paul Smith
Paul Smith & Finn Juhl
덴마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핀 율에게 존경을 피력하는 컬렉션이다. 핀 율은 가구를 조각의 차원으로 끌어온 거장이다. 조각의 차원은 미에 매몰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인간의 곡면을 능수능란하게 받아들이는 가구를 디자인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핀 율은 사람이 가진 삼차원의 형상을 고려해 가구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곧 북유럽 가구의 실용성을 대변하는 개념이 되었다. 194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모더니즘 사조를 이끈 주요 인물로, 가구사에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다.
57 Sofa ©Paul Smith
108 Chair (위)와 109 Chair (아래) ©Paul Smith
France Chair ©Paul Smith
무엇보다 폴 스미스가 핀 율을 논한 이유가 있다. 바로 색깔을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핀 율은 다양한 색상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했던 디자이너다. 핀율이 디자인한 사이드보드와 글로브 캐비닛을 보면 언뜻 폴 스미스 특유의 다채로운 스트라이프 패턴이 떠오를 정도.
난색 계열의 색을 원목 가구와 잘 어우러지도록 한 핀 율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건축가나 디자이너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그의 가구는 따뜻하고, 가만 보면 인류의 원시가 읽히는 듯도 하다. 그만큼 위화감이 없다. 가구가 공간의 분위기를 지배한다고 했던 핀 율의 철학이 전달되는 것인지.
©Paul Smith
놀라운 선의 전개 방식과, 단순하기에 우아한 핀 율의 미적 정체성도, 폴 스미스가 그를 차용하는 이유가 되었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아름답게 보이는지 핀 율은 이해했다. 폴 스미스가 그랬듯 핀 율도 자연에 충실한 관찰자였다.
©Paul Smith
©PIXAR
Anglepoise® and Paul Smith Type75™
일명 픽사 조명이라고도 불리는 앵글포이즈.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의 로고에 등장하는 스탠드가 바로 앵글포이즈 조명이다. 1932년에 스프링을 탑재한 앵글포이즈의 오리지널 모델이 처음 출시되었고, 이는 각도가 조절되는 최초의 조명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조지 카워딘이, 사람이 움직이는 팔의 가동범위에 착안하여 개발했다.
애초에 처음 쓰임새는 제조라인을 비추는 산업용 조명이었다. 그러나 당시로는 최고의 유연성을 자랑하는 선도적인 제품이었기에 점차 가정과 사무실에서도 널리 사랑받게 되었고 오늘날 영국 디자인을 상징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각도만으로 시야각과 빛의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개념의 원류가 되는 조명이다.
©Paul Smith
폴 스미스와 산업 디자이너 케네스 그레인지가 협업한 Anglepoise® and Paul Smith Type75™는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앵글포이즈의 디자인이 지금까지도 바디를 지탱하는 뼈대와 스프링의 노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만큼, 협업 컬렉션의 경우도 같은 맥락을 지켜야만 했다.
케네스 그레인지는 이 점에 착안해 바디의 노출 포인트를 일관되게 가져가면서 형태와 기능 면에서 약하거나 부족해보이지 않도록 전체 골조를 구조화했다. 더불어 색상의 장인 폴 스미스는 제품에 대한 다채로운 접근이 가능하도록 몬드리안과 반 되스 부르크가 창안한 추상미술 그룹 ‘데 스틸’의 사조를 참조했다. 이 부분은 특히 에디션 3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색상의 과감한 표현으로 나타난 대담하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Paul Smith
Paul Smith for The Rug Company
더 러그 컴퍼니의 소유주는 노팅힐에 있는 폴 스미스의 웨스트본 하우스에서 폴 스미스를 만나 카펫을 디자인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 그들의 대화는 시종일관 유쾌했고 자연스레 협업이 성사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가게를 활발히 오가며 철학과 작업 과정을 공유했다. 폴 스미스는 러그 디자인을 참여한 과정을 자신의 옷, 셔츠, 니트의 진보라 표현했다.
폴 스미스가 더 러그 컴퍼니를 위해 디자인한 러그는, 네팔에 있는 장인들이 티벳산 울을 원재료로 하여 직접 손으로 일일이 매듭을 지어 만든다. 이 과정은 장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폴 스미스가 항상 자신의 디자인 철학으로 추구해온 가치가 반영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색상은 자연스러울수록 표현하기가 더 까다롭다.
©Paul Smith
러그에 나타난 색감을 물감으로 따지면 유채보다는 수채 느낌에 가까운데, 이는 색의 강도와 포화를 지향하기보다는 서로를 침범하듯 침범하지 않는 미묘한 줄타기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러그는 오늘날 인테리어에 재미와 색채를 더하는 요소라는 점에 집중한 것.
다소 혼탁한 명도와 채도는 다분히 의도가 짙은 표현이며, 러그는 공간의 주 요소가 아니라 보조 수단이라는 특성이 있기에 지나치게 과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라데이션을 통해 색의 섬세함을 면밀히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특히나 레이어로 겹겹이 색을 올려가는데, 이때 색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다른 색으로 매끄럽게 넘어간다. 따라서 각각의 색상은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합치된다. 층층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폴 스미스를 상징하는 스트라이프 패턴은 내부 문짝에 자그맣게 들어가며 폴 스미스의 장난기를 표시하는 표식과 같다 ©Paul Smith
The MINI Strip (co-)created by Paul Smith
비로소 미니. 폴 스미스의 협업 중에서 미니를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왜냐면 미니는 무지개 스트라이프 패턴의 시작이 되었던, 폴 스미스에겐 오브제가 되는 사물체이어서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시작은 1997년. 폴 스미스는 다색실이 감긴 봉을 보고 영감을 떠올렸다. 자동차의 외피에 이 실들의 색상을 고스란히 입히면서 밝은 에너지를 표출하도록 했다.
©Paul Smith
다만 지금 논할 미니 스트립은 이전의 협업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 ‘벗기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Strip의 의미처럼, 폴 스미스를 상징하는 페인트 요소를 과감히 걷어냈기 때문이다. 폴 스미스는 미니 스트립을 통해서 단순성, 투명성,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탄소중립과 필환경 시대 자동차의 디자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Paul Smith
폴 스미스는 일회성 자동차를 어떻게 기존 골격을 해치지 않으면서 새롭게 만들어낼지 수 개월을 골몰했다. 그는 3도어 미니 쿠퍼 SE의 구조를 완전 분해하여, 다시 재조립 과정에서 최소한의 외관만을 보여주고자 했고 이에 따라 프레임의 필수 요소만 사용하여 차량을 재구성했다.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재활용 퍼스펙스 아크릴, 고무, 코르크와 같은 친환경 소재가 부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재사용이 가능한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소형 프리미엄 자동차라는 미니의 명성에 걸맞도록 마감을 신경 쓴 부분이다.
불필요한 마감을 덧대기보단 개념적인 요소를 줄이는 미니멀리즘에 초점을 맞춰 지속가능한 디자인이 무엇인지 그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기존 가죽과 크롬을 답습하지 않고, 원료와 나사를 의도적으로 노출한 점도 이와 관련된다. 이는 알루미늄 스티어링 휠과 같은 요소를 최대한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Paul Smith
Paul Smith + Caran d'Ache
폴 스미스가 표현하는 색의 농담이 가장 짙게 드러나는 물건이다. 색채를 다루는 공통분모가 있는 두 브랜드는 벌써 세 번째 협업을 가졌다. 1915년 스위스에서 설립된 필기구 및 화방용품 제조업체 까렌다쉬는 색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물건을 생산한다. 필기감과 색의 표현성은 물론이고, 육각형의 바디에서 오는 클래식함까지 표현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 스미스도 마찬가지. 애초에 그의 시그니처 패턴 또한 24가지 색상이 86가지 각기 다른 굵기의 선으로 변주되는 것이므로 둘 간의 협업은 어느 작업보다 가장 시너지의 밀도가 높은 일이라 말할 수 있다. 폴스미스 또한 평소에 까렌다쉬 849 볼펜을 상비하고 다닐 정도로 즐겨 쓰곤 한다.
까렌다쉬 849 협업 모델 ©Paul Smith
런던에 거주하는 아티스트 Fred Coppin이 폴 스미스와 까렌다쉬의 협업 제품으로 그린 그림 ©Paul Smith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디지털 시대임에도 아직도 수많은 디자이너가 전통 도구의 감각에 의존한다는 것. 이미 폴 스미스 스스로도 자신이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그림과 다른 전통적인 미술 도구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전한 바 있다. 따라서 색채는 폴 스미스의 경력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며, 그 한 축을 분명 까렌다쉬 펜이 맡고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