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수평의 세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서양의 신전 건축을 대변한다면 동양엔 조선의 종묘가 있다. 두 건축물은 모두 신전 건축의 위용을 자랑한다. 웅장하다. 그러나 웅장함의 형태는 사뭇 다르다. 파르테논이 직선을 강조하는 것을 기본으로 수평을 잡아나갔다면, 종묘는 수직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수평의 형태를 강조한 모습을 보인다. 파르테논이 균형을 지향하는 건축물이라면 종묘는 무한을 지향하는 건축물이다.
종묘의 모습 자체는 질박하다. 요소요소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수수한 느낌을 받는다. 색채와 치장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공간에서 거닐어보면 첫 느낌은 완전히 반전된다. 기와지붕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방문자를 품어주고 거친 박석으로 포장한 바닥은 생사의 경건함을 알려준다. 정제하지 않고 투박하게 툭 가져다 놓은 돌은 걸음걸이에 신중을 기하라는 주문인 동시에 햇빛의 반사를 막으려는 시도다. 여기서 종묘의 매력이 나온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종묘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익숙할 테다. 흔히 사극에서 나오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조선을 상징한다. 그래서 종묘는 말 그대로 국가의 근간이 되는 건축물이다. 조선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처음 건립한 건물이 종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위압감은 없지만, 짙게 깔린 장중한 분위기가 사람을 엄숙하게 만든다. 과장하지 않음에도 그 옛날 왕의 권위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그런 이유로 종묘에 들어서면 전혀 예기치 못한 무거움에 놀랄 때가 있다. 국내외 건축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독특한 공간성이다.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11대 프리츠커 수상자인 프랭크 게리는 이 종묘의 묘한 매력에 이끌린 인물 중 하나다. "이렇게나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는다면 파르테논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도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가로 길이 109미터.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인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왕이 정기적으로 제사에 참배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며 왕실의 정통성을 세상에 공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한국의 건축물을 단 하나 꼽는다면 종묘를 뽑는 국내외 건축가들이 많다. 호평을 받는 걸작이다.
원래는 태조 4년(1395)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선조 일행은 당시 피난길에 위패를 챙겼으니 완전 소실은 면했다. 이후 광해군 원년(1608)에 다시 지어져 몇 차례 수선을 통해 지금의 종묘로 남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뒤이어 2001년 종묘제례가 등재되었다. 건축물과 더불어 종교의식이 온전한 형태로 남은 건 동양에서 유일하다. 종묘의 상징성이 조선시대 내내 어떤 의미였을지 방증하는 일이다.
궁궐이 산 자의 공간이라면, 종묘는 망자의 공간이라 표현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일부만 맞는 말이다. 종묘는 망자를 빌려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공간이다. 망자를 존중하는 의식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본래 예로부터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무형의 권력을 잡았듯, 유교의 제례 또한 마찬가지다. 즉위한 왕은 결코 종묘의 제례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극진한 태도를 보여야 자신의 신위 또한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따라서 종묘는 과거 권력에 대한 존중인 동시에 현재 권력을 강화하고 미래 권력에 대비하는 순환적 세계관 안에 존재한다. 숲속에 있어 자연과 어우러지는 경관을 보여준다는 말들은 그저 부차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갈참나무 숲이 정전을 외투로 감싸듯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신의 세계와 속세를 구분하고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한 번 더 곱씹어 보면 왕실의 상징을 최대한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의미임을 파악할 수 있다. 왕권의 상징에 맞닿으려면 그만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종묘가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소나무가 숲의 주인이었다. 다만 소나무의 가벼운 질감보단 가지와 잎사귀가 상대적으로 큰 참나무가 종묘가 함의하는 건축물의 권위를 돋보이는 데 더 적합하다고 보면서 점차 수종의 비율을 조절해 지금은 우리가 보는 참나무 숲으로 남았다. 이 숲을 통과해야 비로소 종묘의 주 무대인 정전이 나온다. 왕실의 신성은 불가침한 영역에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자연 장치다. 건축과 자연의 연결을 중요시했다는 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이 아닌 이유다. 자연은 종묘라는 건축물을 보호하는 일종의 결계라 할 수 있음이다.
종묘의 방향은 유독 동쪽과 관련이 깊다. 일단 왕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종묘를 방문하려면 신이 다니는 남문이 아닌 동문으로 가야 했다. 증축할 때도 동쪽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풍수지리에 뿌리를 둔 조선 건축의 특징이다. 지금 정전은 총 19칸의 신실이 있으나 초창기엔 7칸이 전부였다. 세종 즉위 시기에 이르러 신실 7칸이 모두 임자를 찾은 탓에, 영녕전을 새로 만들었다.
이후에 명종 대에 이르러 추가로 정전을 증축하면서 오늘날 종묘의 모습이 되었다. 왕조의 명운과 함께한 일이다. 그에 따라 서쪽에서부터 동쪽까지 왕의 서열에 따라서 신위가 자리한다. 독립된 각 신실이 길게 수평으로 이어지며 목조건축물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중국의 종묘가 9칸임을 안다면 쉽게 와닿을 것이다. 처마 밑 그늘과 마당에 내리쬐는 빛의 대비가 장방형으로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 장관이다. 자연이 건축에 옷을 입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음이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안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이다. (중략) 종묘는 일그러진 서울의 중심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경건한 장소이며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는 건축이다." 건축가 승효상의 선언이다. 말인 즉, 건축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축조함이라는 것.
건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 표현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종묘는 탁월한 건축의 표상이다. 서양의 건축물을 볼 때처럼 건축물의 개별성만을 뜯어본다면 종묘의 위대함을 느낄 수가 없다. 건축물이 세워진 장소의 특성을 엿봐야 한다. 장소 안에서 더 나아가 지역을 고려하면서 대해야 한다. 바로, 풍수지리. 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건축을 대하는 옛 선조들의 태도였다.
비록 수평선은 무한히 확장하다 1910년 국권을 침탈당하며 어느 순간에 끊겼지만 그래서 종묘의 의미가 더욱 배가되는 듯하다. 유한한 인간의 수명과 사후세계에 대한 존중이 드러난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었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이다.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빈켈만이 그리스 조각을 찬양하며 한 말이다. 많은 국내 지식인이 종묘를 비유할 때 드는 문장이기도 하다. 종묘를 보며 이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은 종묘에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