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과 신념을 품고 하늘 높이 날아간 그리펜
자동차는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을 이뤄온 기계다. 디자인, 안전, 성능 등 여러 방면에서 수십 년 동안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거듭났고, 앞으로의 수십년 동안도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새롭게 진화할 것이 분명하다.
자동차는 끊임없는 진화를 이뤄왔다 ©Mercedes-Benz
자동차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겹겹이 쌓여 이뤄졌다. 여기서 뜻하는 '성공'은 오늘날의 자동차에 살아남은 요소들로 쉽게 연상될 수 있지만, '실패'는 그보다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단순 기술적인 결함으로 인한 실패뿐만 아니라, 이론상으로는 완벽했을지언정 시장성이 부족해 실패로 이어진 요소도 있고, 시장성을 갖춘 것을 넘어 한 시대의 트렌드로 유행했던 요소가 점차 생명력을 잃은 경우도 있다.
팝업 헤드램프와 로터리 엔진은 오늘날 사라졌지만, 과거의 매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Supercars.net, Driven
이처럼 자동차 발전에서의 '실패 요인'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실패로만 기록돼 잊혀지지 않고 '과거의 매력'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한때 굳은 철학을 지켜오며 진정성으로 움직이다 경영난으로 힘을 잃은 브랜드, 각종 법규의 변화로 사라진 디자인 트렌드, 혁신으로 주목받았으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사라진 기술 등 그 종류도 여러 가지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들, 자동차 세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사라졌지만 잊혀지지 않을' 한 브랜드의 이야기를 깊이 살펴봤다.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 자동차 회사로 볼보를 곧장 떠올리지만, 불과 10년 전까지 볼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가 하나 더 있었다. 이제는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사브'가 바로 그 주인공.
사브는 자동차 제조사로 알려지기 이전에 전투기를 생산했다 ©SAAB AB
'사브 AB'는 1937년, '스벤스카 에어로 AB'와 ASJA의 합병으로 스웨덴 트롤헤탄(Trollhättan)에서 설립된 항공기 제조사다. 본래 군용기와 항공 엔진 제작이 주력 사업이었으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투기 수요가 줄어들면서 승용차 개발로 자동차 제조사로서의 첫걸음을 디뎠다.
'사브 오토모빌 AB'로 분리된 뒤, 92를 선보이면서 자동차 제조사가 되었다 ©SAAB Planet
이에 자동차 사업부인 '사브 오토모빌 AB'가 설립된 것은 1945년. 이후 '우르사브(Ursaab)'라는 명칭의 프로토타입 네 대를 개발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1949년에 첫 양산차 '92'를 선보였다. 폭스바겐 비틀, 오펠 카데트 등 소형 독일 승용차를 겨냥해 군나르 융스트롬(Gunnar Ljungström)이 설계를, 식스텐 사손(Sixten Sason)이 디자인을 책임졌다.
사브 92 출시 전 프로토타입으로 개발된 '우르사브(Ursaab)' ©Wheelsage
당시의 사브는 자동차 개발 경험이 없는 제조사였을 뿐만 아니라, 개발 팀 중 운전면허를 가진 엔지니어가 두 명 뿐이었을 정도로 모든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항공기 개발을 통해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엔진과 구동계를 개발하고, 독특한 유선형 차체를 디자인해 공기역학적으로 우수한 차체를 만들었다.
사브 92의 생산 라인 ©Saablog
당시의 기술로 92의 유려한 차체를 제작하기 위해, 외관 부품을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대신 철판을 통째로 찍어낸 뒤 문과 창문이 들어갈 부분을 잘라내 다시 붙이는 독특한 제조법을 택했다. 이러한 갖은 노력 끝에 양산에 성공한 사브 92의 유선형 차체는 공기저항계수 0.3을 기록했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우수한 수치이며,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생산됐던 폭스바겐 골프 7세대 모델과 일치하는 수준이다.
2008년 르망 클래식에 출전해 높은 성적을 달성한 사브 93 ©Saab-andan
사브 92는 1956년에 93으로, 1960년에는 96으로 이름을 바꾸며 꾸준히 개량됐고, 1980년까지 31년 동안 약 62만 대가 생산돼 북유럽 출신 소형차로서 그 존재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특히 1959년식 사브 93은 49년 후인 2008년, '르망 클래식' 내구 레이스에 출전해 동일 클래스 1위와 전체 클래스 2위를 달성하는 진풍경을 낳았다.
다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기존의 92보다 현대적이고 차체를 키운 모델을 시장에 선보일 필요가 생겼다. 그 결과, 식스텐 사손이 92에 이어 다시 디자인을 주도한 끝에 '사브 99'가 1967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브 99는 당시 모든 자동차 제조사가 노리던 시장인 미국을 겨냥해 중형급 포지션으로 개발됐다. 차체 길이는 사브 92보다 약 420mm, 폭은 56mm 더 늘어나고, 신기술을 대거 적용했다.
동급 경쟁 모델인 BMW 1602와의 디자인 비교 ©Netcarshow, Car and Driver
사브 92 이후 19년 만에 나온 신모델인 만큼, 디자인 또한 현대적으로 새롭게 완성됐다. 다른 제조사 차량들과 마찬가지로 엔진룸-실내-트렁크의 구분이 명확한 3박스형 차체로 바뀐 동시에, 여전히 공기역학적인 효과를 중시함으로써 사브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앞 유리에 있다. 당시의 동급 차량보다 앞 유리가 차체 양옆을 향해 휘어져, 주행 시 시야가 더 넓게 트인 개방감을 선사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항공기 제조사에 뿌리를 둔 기업답게 전투기 캐노피를 닮은 디자인을 가졌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또한, 면의 굴곡이 차체를 향해 휘어진 대부분 차량과 달리 뒷유리에서 트렁크로 이어지는 라인이 바깥을 향해 휘어져 있어, 다른 자동차와 확연히 구분되는 사브만의 정체성을 불어넣었다. 밖으로 휘어지면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듯한 후면부는 '오리 엉덩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리기도 했다.
사브 99의 1열 좌석 사이에 자리 잡은 키 박스 ©Saablog
사브 99는 실내에도 독특한 특징을 남겼다.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거는 키 박스가 흔히 핸들 뒤에 있는 것과 달리, 1열 좌석 가운데로 열쇠 구멍이 변속기와 나란히 있었다.
이는 안전을 위해 의도된 설계로, 당시 금속으로 제작된 열쇠가 사고 시 운전자 신체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일반적인 구조보다 탑승 시 팔이 자연스럽게 향하는 위치에 열쇠를 꽂을 수 있도록 위치를 옮긴 것이다. 사고 및 위급 상황 중에도 시동을 빠르게 끌 수 있는 장점도 함께 가졌다.
사브 99가 최초로 도입한 헤드램프 와이퍼 ©FCP Euro
8km/h 이하로 충돌 시 자가 회복이 되는 범퍼 ©Saab Planet
독특한 외관과 안전을 위한 실내 구성뿐만 아니라, 사브가 도입하거나 개발한 실험적인 기술이 99에 적극적으로 적용됐다. 그 결과, 출시 이후 1984년까지 16년간 생산되면서 연식 변경에 따라 혁신적인 변화를 이어갔다.
1970년에는 세계 최초로 헤드램프 워셔와 와이퍼가 적용됐고, 다음 해에는 열선 시트를 기본 옵션으로 제공하는 세계 최초의 모델이 됐다. 충격 흡수식 자가 회복 범퍼 또한 사브 99를 통해 선보였다.
1977년에 공개된 '99 터보'는 사브 최초의 터보 탑재 모델이었다 ©Wheelsage
하지만 사브의 핵심적인 정체성과 관련해 99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상징은 따로 있다. 1977년에 성능을 크게 개선한 '99 터보'가 공개됐는데, 이것이 사브 최초의 터보차저 탑재 모델이었다.
세계 최초의 터보 탑재 모델인 쉐보레 코르베어 몬자 ©Mecum Auctions
유럽 최초의 터보 탑재 모델인 BMW 2002 터보 ©BMW
사실 터보는 그 이전부터 자동차에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사브가 최초로 선보인 기술도 아니었다. 1962년에 GM 그룹의 '쉐보레 코르베어 몬자'와 '올즈모빌 F-85 제트파이어'가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BMW도 이미 사브보다 4년 일찍,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진 '2002 터보'로 유럽 최초의 터보 엔진 양산차를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브가 터보 기술의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자동차 산업에 터보의 대중화를 앞당긴 주역이기 때문이다. 사브보다 터보 도입이 앞섰던 모델들이 흥행을 이루지 못하고 단명하거나 주행이 까다로웠던 것에 비해, 99 터보는 대중적인 승용차를 바탕으로 개발돼 고성능과 주행 안정성을 모두 갖췄다.
사브 99 터보는 날렵하게 떨어진 후면부가 특징인 '콤비 쿠페' 사양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Wheelsage
99 터보 전용으로 디자인된 '잉카 휠'은 차를 더 특별하게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Saab Heritage
99 터보는 기존의 2도어 모델보다 뒷부분이 날렵하게 새로 디자인된 '콤비 쿠페' 사양을 바탕으로 출시돼 스포티한 인상을 한껏 강조했고, 터보 버전 전용 디자인으로 선보인 ‘잉카 휠’과 트렁크 윙을 달아 일반형 모델과 확실히 구분되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존재감을 달리 한 외관과 더불어 2.0리터 4기통 엔진에 터보를 얹은 덕분에 눈에 띄는 성능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출시 당시 같은 연식의 일반 모델의 최대 출력이 100마력이던 것에 비해 145마력으로 힘을 끌어올리고, 최고 속도를 164km/h에서 196km/h로 높였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고성능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던 포르쉐 911 SC의 최고 속도가 225km/h인 점을 참고하면 당시 승용차 기반 모델로서는 눈에 띄는 성능 향상을 이룬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사브 99 터보는 광고에서 전투기 혈통임을 강하게 드러냈다 ©Flickr
99 터보는 사브가 고성능 시장에 안착하는 계기가 됐다. 높아진 차량 성능과 더불어 전투기 제조사 태생인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기술과 안전, 고성능을 고루 갖춘 브랜드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불어넣었다. 사브가 선보인 터보 엔진은 단순 출력 상승 뿐만 아니라, 고속에서도 지치지 않는 가속력으로 그 매력을 보여줬다.
사브 99보다 상위 모델로 1978년에 출시된 '사브 900' ©ebay
99로 물꼬를 튼 사브의 터보 기술은 상위 모델로 1978년에 출시된 '사브 900'에서 본격적인 대중화로 이어졌다.
식스텐 사손 사후, 그의 제자 출신인 비요른 엔발(Björn Envall)이 디자인한 사브 900은 99와 차체를 공유하는 모델이지만, 강화된 안전 규정을 충족하기 위해 전면부를 더 길게 고치고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혀 실내와 주행 성능을 개선했다. 그 결과, 기존의 3도어 콤비 쿠페에 이어 5도어 해치백 세단이 새로 추가되고, 출시 이후 4도어 세단과 컨버터블로 라인업을 넓혔다.
사브 900 터보 후기형 모델에 탑재된 16-밸브 터보차저 엔진 ©Curbside Classic
1984년부터 1998년까지 생산된 사브 9000 ©Wheelsage
사브의 터보 엔진은 900이 생산된 기간 동안 효율성과 안정성에서 발전을 이뤄 엔진 배기량 대비 넉넉한 성능과 향상된 연비를 갖췄다. 99에서부터 계속 이어진 독특한 디자인과 기술적 혁신, 전투기에서 비롯된 혈통을 강조한 900은 사브 창립 이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으면서 1994년까지 908,817대가 생산됐다. 900의 성공은 나아가, 한 단계 더 높은 등급의 준대형 세단인 사브 9000의 개발과 출시로도 이어졌다.
후기형에 해당하는 1989년식 사브 900 터보 ©Car and Classic
각진 모습을 벗어나 다양한 디자인이 홍수처럼 쏟아지던 1990년대에도 사브 900의 독특한 모습은 여전히 사브 고유의 매력을 잃지 않았다. 특히 1987년에는 부분 변경을 거치면서 전면부가 비스듬해지고 범퍼 형상이 현대적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3도어 쿠페의 디자인은 오늘날까지도 사브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후기형 900 터보 쿠페는 굴곡진 앞 유리와 바깥으로 휘어진 후면부 바디 라인이 1980년대 후반의 스타일링과 만나 독특한 디자인을 품은 동시에, 투톤으로 마무리된 색상과 삼각형 구성의 에어로 휠로 동시대의 차량과 다른 매력의 레트로함을 가졌다.
'드라이브 마이 카' 소설 원작 속의 사브 900 컨버터블 ©Bilweb Auctions
영화에서는 빨간색 터보 쿠페가 등장했다
©The Japan Times
이러한 독특한 매력 덕분에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단편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주인공의 자동차를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로 설정하고, 같은 이름의 영화에서는 빨간색 900 터보 쿠페가 등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브 900의 흥행 이후 회사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혁신과 터보를 정체성으로 내세워 충성심 강한 매니아를 얻었으나, 개발에 투자한 막대한 비용을 회수하기에는 스웨덴의 작은 내수 시장은 역부족이었다. 아울러 부분 변경으로만 신차를 선보이는 등 디자인 전략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잃어갔다.
GM2900 플랫폼을 바탕으로 제작된 오펠 벡트라 ©Favcars
사브 900 2세대 모델은 오펠 벡트라와 플랫폼을 공유했다 ©Wheelsage
경영난에 처한 결과, 사브는 1989년 GM에게 지분 50%를 내어주어 순수 스웨덴 브랜드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사브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GM은 노후된 모델을 최신화하기 위해 오펠 벡트라 개발에 사용된 GM2900 플랫폼으로 신형 900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고성능 사양으로 나온 '9-3 비겐(Viggen)'. 한때 사브가 생산했던 전투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Wheelsage
많은 사브 팬들이 이러한 현실을 아쉬워했지만, 그럼에도 사브가 현실에 완전히 타협한 것은 아니었다. GM의 플랫폼을 사용하면서도 본래 추구하던 기대치에 맞는 안전과 주행 성능을 선보이기 위해 설계를 대거 수정하고, 엔진과 전자 부품 상당수도 기존 GM 차량과 공유하지 않았다. 그렇게 1993년에 2세대 900을 선보인 데에 이어 1998년에는 부분 변경을 거쳐 이름을 바꾼 '9-3'이 출시됐다.
사브 9000을 뒤이어, 신형 준대형 세단으로 출시된 9-5 ©Wheelsage
1990년대에 들어 900과 9000의 명맥은 후속 모델인 9-3과 9-5로 이어졌다. 2000년에 GM이 사브의 모든 지분을 사들여 자회사로 인수한 이후에도 사브 터보 엔진 특유의 감성과 디자인은 두 모델에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리먼 브라더스 파산 등의 여파로 발생한 세계금융위기 ©Bloomberg
하지만 사브 고유의 브랜드 이미지를 끝내 살리지 못한 GM의 경영과 더불어,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위기를 타개하지 못했다.
중형급인 9-3과 준중형급 9-5 두 모델만으로 구성된 빈약한 라인업은 대중성 있는 프리미엄 시장에서 경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GM은 라인업 확장을 통해 판매량을 끌어 올릴 계획이었으나,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모두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사브가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GM의 다른 모델을 사브 브랜드로 출시해 판매하는 것이었다.
사브 9-2X(좌)라고 쓰고 스바루 임프레자 왜건(우)라고 읽고 ©Wheelsage
사브 9-7X(좌)라고 쓰고 올즈모빌 브라바다(우)라고 읽는다 ©Wheelsage
그렇게 2000년대 중반, 당시 GM 소속의 올즈모빌 그리고 GM과 제휴 관계였던 스바루의 차량이 각각 SUV인 9-7X와 준중형 왜건인 9-2X로 출시됐다. 두 모델 모두 사브의 안전 관련 옵션을 조금이나마 채택하고 프리미엄 모델로 미국 시장에 공개됐지만, 결국 범퍼와 그릴, 핸들에 붙인 로고를 사브 스타일로 바꿨을 뿐 사브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 흥행에 실패했다.
모델 확장에 실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금융위기 사태는 GM에도 큰 악영향을 미쳐, 2010년에만 네 개 브랜드가 정리됐다. 사브도 이 과정에서 함께 정리돼 네덜란드의 슈퍼카 제조사인 '스파이커'에 어렵사리 인수됐다.
2006년 사브 에어로 X 컨셉트(위), 2011년 사브 피닉스 컨셉트(아래) ©Wheelsage
그러나 소속을 옮긴 뒤에도 재정난으로 생산 지연과 파산을 겪어, 출시가 예정됐던 신모델도 소수만 공장 밖으로 나오거나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한채 미완성 프로젝트로 남는 결말을 맞았다.
에어로 X 컨셉트와 닮은 2세대 9-5(위). 9-5 스포츠콤비(아래)는 단 35대만 생산됐다 ©Wheelsage
2006년 에어로-X와 2011년 피닉스 등 미래의 사브 디자인을 암시한 컨셉트카도 있었지만, 재도약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에어로 X의 스타일링과 사브 99, 900의 실루엣을 재현한 2세대 9-5가 2009년에 공개돼 생산됐지만, 11,280대가 생산된 뒤 2년 만에 파산과 함께 단종됐다. 왜건형인 스포츠콤비도 개발을 마쳤지만 시제품으로 단 35대만이 생산됐다.
9-4X도 출시 직후 GM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단종됐다 ©Wheelsage
9-5 이후에도, 캐딜락 SRX와 플랫폼을 공유한 도심형 중형 SUV로 9-4X가 새로 출시됐으나, GM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단종 처분을 받고 814대만이 생산라인 밖을 나왔다.
위 모델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가까스로 공장 밖을 나왔지만, 2013년에 선보일 예정이었던 일명 '9-3 피닉스'는 끝내 디자인 연구용 모형으로만 남아 있다 훗날 사진으로 공개됐다.
제이슨 카스트리오타가 디자인한 미발표 사브 차량. 아래의 두 대가 3세대 9-3이 될 예정이었다 ©Forococheselectricos
컨셉트카 피닉스의 미래적인 스타일과 900의 헤리티지가 느껴지는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4도어 세단이 돼야 했었지만, 사브를 이어받은 모기업들의 운영 부실로 양산을 이루지 못했다. 페라리 599 GTB와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를 디자인한 제이슨 카스트리오타(Jason Castriota)를 신형 9-3 디자인 총괄로 영입했을 정도로, 당시의 사브는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을 갈망하고 있었다.
NEVS 간판이 들어선 사브의 트롤하탄 공장 ©Bohuslaningen
새 주인을 찾아 옮겨 다닌 끝에, 사브는 중국 헝다그룹의 지분으로 운영되고 있는 NEVS에 2012년에 인수돼 오늘날까지 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GM과 항공기 제조사인 ‘사브 AB’로부터 브랜드 판권을 얻지 못해, 본래 상표 대신 NEVS를 브랜드로 사용 중이다.
NEVS는 중국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사브 9-3 전기차를 개발 중이다 ©NEVS
NEVS가 2020년에 공개한 자율주행 셔틀 프로토타입 ©NEVS
또한 터보로 명성을 쌓은 과거와 달리 사브 9-3를 바탕으로 전기차를 개발 중이며, 자율주행 셔틀 컨셉트카를 새로 선보이는 등 미래형 모빌리티 제조사로 전환을 준비 중이다. 다만 사브의 기존 기술진 상당수가 NEVS에 소속돼 있고, NEVS 또한 과거의 사브가 쌓아 온 헤리티지를 존중하는 입장이기에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는 미지수다.
2세대 사브 9-3 세단을 바탕으로 제작된 미발매 모델 '9-3 터보 에디션' ©SAAB Planet
한편, 2014년에는 사브 창립 40주년을 맞아 '9-3 터보 에디션 컨셉트카'를 제작했다. 사내 프로젝트였기에 NEVS 대신 사브 브랜드를 살려, 2세대 9-3 세단의 차체에 과거 99 터보를 닮은 도색과 휠을 추가해 레트로한 감성의 스포츠 세단을 만들었다.
136년의 자동차 역사 동안 많은 제조사가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모든 브랜드가 항상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위인이 이룬 활약과 업적을 오늘날까지 기리고 옛 명작을 다시 꺼내어 음미하는 것처럼, 굳은 철학과 신념으로 움직여 온 브랜드는 사라지거나 활력을 잃더라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독특한 디자인과 터보, 전투기 혈통은 사브만의 독보적인 DNA가 됐다 ©Flickr
자동차 세계에서는 사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늘날 소멸 직전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한때 볼보와 함께 북유럽 자동차 산업을 대표해 안전과 성능을 위한 기술로 산업 전반에 이로움을 널리 가져다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울러 99와 900으로 상징되는 독특한 디자인, 항공기와 터보로 표현된 공학적 야성미는 단연 사브만의 독보적인 DNA다.
스마트키를 사용하는 현시대에도 옛 모델에서 비롯된 특징을 계승해 왔다 ©Wheelsage
굴곡이 큰 앞 유리와 바깥으로 휘어진 후면부 라인, 변속기와 함께 놓인 키박스, 삼각 모양의 에어로 휠, 끊임없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사브 특유의 주행 감성. 말 그대로 사브만이 가진 남다른 특징들이 여느 자동차 제조사와는 다른 길을 걸어 온 과정을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수될 위기를 겪는 동안에도 진정성 있게 추구해 온 본연의 정신을 고수한 것은, 여느 브랜드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고집 강한 책임감이기도 하다.